조선 말기,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던 시기. 그 격변의 중심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한 개혁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옥균입니다. 그는 조선의 문을 열고 서구 문명을 도입하려 한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외세와 복잡하게 얽힌 외교 전선 위에서 좌절되었고, 생애 말기까지도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라는 논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선 개화운동의 배경과 김옥균이 펼친 외교 전략, 그리고 그 역사적 평가를 입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개화의 문을 두드린 김옥균의 정치적 등장
김옥균(1851~1894)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조선 말기 대표적인 개화파 정치인이자 실천적 개혁가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성균관을 거쳐 1880년대 조정에 진출하며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합니다. 특히 당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며, 문호 개방과 서양 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는 소장 개화파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개화파는 크게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나뉘는데, 김옥균은 후자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기존 양반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빠르고 강한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동지로는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있었고, 이들은 '젊은 조선', '자주적 조선'을 모토로 활동했습니다.
김옥균은 초기에는 청과의 외교를 지지했으나,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하자 방향을 틉니다. 그는 서구 열강, 특히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옥균의 외교 전략이 본격화됩니다. 그는 국내에서의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외부 압력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유도하려 했던 것입니다.
갑신정변과 외세 활용 전략
1884년,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이 정변은 조선의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3일간 한성에서 일어난 무력 쿠데타였습니다. 김옥균과 개화파는 이 정변을 통해 왕권 중심의 정치를 내각 중심 체제로 개편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며, 국가 재정을 개편하는 등의 14개 조 개혁안을 발표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의 외교 전략은 두 가지 축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는 내부 개혁의 실현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협력을 통한 개입입니다. 그는 일본 공사관과 밀접하게 협력하였으며, 정변 직후 일본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여 정부를 보호하려 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현실적 자립 역량이 부족하다는 전제 아래, 일본의 힘을 빌려 체제를 바꾸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정변 3일 만에 청군이 개입하며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이 사건은 조선 민중에게는 큰 혼란을 안겼고, 외세 의존에 대한 비판도 커지게 됩니다. 또한 이후 조선 내 친청, 친일, 친러 세력이 경쟁하게 되는 복잡한 외교 구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김옥균은 일본 망명 중에도 계속해서 조선 개혁을 위한 노력을 이어갑니다. 일본 정치인들과 접촉하고, 조선 개혁안을 설파하며 언론에 글을 기고하는 등 '외교적 망명자'로서 활동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의 외교 전략은 점점 고립되어갔고, 조선 정부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여 암살 지시를 내립니다.
김옥균의 외교전, 그 의도와 역사적 평가
김옥균의 외교 전략은 실용주의적 접근이자 시대를 앞선 개혁 시도였다는 평가와 함께, 외세 의존과 자주성 훼손이라는 비판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의 일본 활용 전략은 결과적으로 조선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키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일본 제국주의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판단입니다. 당시 조선은 내정은 부패했고, 청나라는 외세의 대리인처럼 군림하며 조선을 자주국이 아닌 속국처럼 대우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옥균은 일본이 유일한 ‘개혁 우군’이라고 판단했으며, 이는 결과보다 당시 선택의 맥락을 고려해야 할 대목입니다.
특히 그는 망명 후에도 조선의 자주권과 근대화를 위한 구체적 정책 제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 내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입헌군주제’와 ‘의회 제도’ 등 새로운 정치 체계를 조선에 접목시키려 했고, 이는 후일 독립운동가들과 개화론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94년, 조선 정부는 결국 일본에서 김옥균을 암살하게 하고, 그의 시신을 본국으로 끌고 와 능욕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라, 당시 보수적 정치 세력의 ‘근대 개혁에 대한 공포’의 발로였습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 김옥균은 다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자주적 개혁을 외친 선각자'라는 시선과, '외세에 기댄 위험한 이상주의자'라는 비판 사이에서 말이지요.
외세와 자주, 그 경계에서 김옥균을 생각하다
김옥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개혁가였으며, 동시에 외세 의존이라는 논쟁적 선택을 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외교 전략은 조선이 처한 현실 속에서 자주와 실용, 개혁과 보존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던진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가의 방향성을 고민하고, 변화의 필요성과 주체적 개입을 논의할 때, 우리는 김옥균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흑백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변화의 어려움'과 '현실 속의 이상'을 동시에 품은, 진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전략과 실패에서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김옥균을 기억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