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죄인 박열 재판의 전말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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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 박열 재판의 전말과 역사적 의의

by 지극성 2025. 6. 12.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무장투쟁, 외교로의 접근, 계몽과 교육 등 방법은 달랐지만, 그 근본에는 공통적으로 조선인의 자존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저항의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이 바로 **박열(朴烈)**입니다.
그는 무장을 들지 않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에서 **사상과 언어로 직접 맞섰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습니다.
특히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대역죄인’으로 재판받은 사건은 일제 통치의 모순을 드러낸 상징적 장면이자,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박열

박열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가 선택한 사상

박열은 190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부터 조선인의 현실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고,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도쿄에서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면서 기성 정치나 체제의 한계를 체감했고, 그 속에서 점차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사상에 공감하게 됩니다.

아나키즘은 단지 국가 부정을 넘어, 모든 권위와 억압의 구조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인간의 평등 공동체를 지향하는 철학입니다.
박열은 이 사상을 식민지 현실과 결합시켜,
“일본 제국주의도, 조선의 부패한 지배층도, 모두 타파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칩니다.

그는 1921년, 일본 내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흑도회’**를 조직하고, 불평등한 식민 현실을 고발하는 『개벽』, 『조선노동연대』 등의 출판 활동에 참여합니다.
또한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의 만남은
그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함께 재판을 받고 투옥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박열은 단순한 급진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인이자 언론인이었고, 말과 글로 저항을 실천하는 문화적 전사였습니다.
그의 저항은 총칼이 아니라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한 깊은 전략이었습니다.

대역죄 재판의 시작: 일왕 폭살 계획 조작과 정치적 의도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조선인에 대한 조직적 학살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사회는 불안을 틈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방화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무고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사회 불안을 조선인과 급진 사상가에게 돌리며,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선택한 인물이 바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였습니다.

일본 당국은 **“박열이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하고,
가네코와 함께 **대역죄(皇室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합니다.
이 대역죄는 일본 형법에서 가장 무거운 죄목으로,
기소된 자는 통상적으로 사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실상은 폭탄도, 실행 계획도, 실질적 준비도 전혀 없었습니다.
박열이 갖고 있던 유일한 ‘증거’는,
그가 스스로 집필한 ‘폭력적 저항의 정당성’에 대한 철학적 글들과
일본 황실에 대한 체제 비판 발언들뿐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그 자체로 일본 제국주의의 검열과 공포 정치,
그리고 사상에 대한 억압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박열은 이 재판을 단지 방어의 자리가 아닌, 저항의 무대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재판정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나는 천황의 목을 베기 위해 살아간다. 그건 내 삶의 사명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합니다.

가네코 후미코 또한 “나는 천황을 부정한다. 그 존재가 사라져야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의 발언은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세계 언론은 이를 “사상과 철학으로 맞선 조선 청년의 반란”으로 보도했습니다.

판결 이후의 삶과 역사적 의미

박열은 1926년 사형을 선고받지만, 국제 여론과 인권 단체의 압박으로 인해
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됩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별도로 수감되던 중 1926년,
옥중에서 의문의 사망을 맞이하게 되며, 이를 ‘자살’로 발표한 일본 당국은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박열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1945년 광복이 되기까지 20년 넘는 세월을 옥중에서 보냅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글을 쓰고,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며,
자유와 정의의 개념을 지속적으로 고찰한 철학자적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1945년 10월, 광복 후 조선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좌우 합작운동에 참여하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대하며 일관된 비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결국 1974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말로 실천하고 철학으로 싸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궤적을 이어갔습니다.

박열 재판의 의미는 단순한 독립운동 사례를 넘어서

  • 사상·철학도 독립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
  • 일제의 폭력적 통치가 어디까지 억압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상징,
  • 국제 사회가 조선인의 저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무장 독립운동’이라는 정통 노선 밖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선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박열, 사상으로 제국에 맞선 지식인의 초상

박열은 총을 든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철학과 언어를 무기로 일제의 심장을 정면으로 겨냥한 전사였습니다.
그의 재판은 일제가 얼마나 사상과 자유를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장면이며,
박열 자신은 그 재판을 민족과 인류 보편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선언의 장으로 바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독립운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았고,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그것을 실천으로 이어간 지식인이었습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가 여전히 흔들리는 시대,
박열의 삶은 우리에게 말의 힘, 철학의 용기, 행동의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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