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전략과 나석주의 실천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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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전략과 나석주의 실천철학

by 지극성 2025. 6. 11.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독립을 향한 다양한 목소리와 방식이 등장했습니다. 외교적 방법을 모색한 임시정부, 계몽과 교육에 중점을 둔 민족운동, 그리고 강경한 무장투쟁으로 저항을 이어간 단체들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과감한 저항을 시도한 단체가 바로 **의열단(義烈團)**이며, 이 전략을 실천적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인물이 **나석주(羅錫疇)**입니다.
그는 단순한 ‘의거 영웅’이 아니라, 명확한 목표와 철학을 가지고 행동한 실천적 혁명가이자 독립사상의 전사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의열단의 전략과 조직 구조, 나석주의 생애와 의거, 그리고 그 철학의 오늘 날적 의미를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

무장투쟁의 전위조직, 의열단의 전략적 구조

의열단은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찾던 시점에 등장했습니다. 김원봉이 주도하여 중국 지린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비정규·비선형 무장 항일투쟁의 선구자였습니다. 의열단은 소수의 결의에 찬 청년들이 직접 폭력과 암살을 통해 일본의 통치 구조를 파괴한다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단순한 폭동이 아닌, 정확한 표적과 상징을 겨냥한 의거형 투쟁이었습니다.

의열단의 전략적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징 표적 타격: 무차별적 파괴가 아닌, 총독부, 경찰서, 일본 군 장교, 식민 금융기관 등 조선 지배의 심장부를 선택적으로 타격했습니다.
  • 정예 비밀 조직: 일반적인 대중 조직이 아닌, 극소수로 구성된 정예조직이었으며, 단원의 익명성과 의지를 핵심 가치로 삼았습니다.
  • 철저한 준비와 훈련: 폭탄 제조, 사격, 암살, 잠행 기술 등을 중국 내 한인 거점에서 엄격하게 훈련했고, 단순히 무장만이 아닌 이념교육과 철학 학습도 병행했습니다.
  • 정치적 효과를 노림: 단순히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의거가 조선 민중에게 ‘해방의 가능성’을 인식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의열단은 일제 입장에선 ‘테러집단’이지만, 조선 민중에게는 ‘민족의 분노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의의 조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서 자신의 생명을 무기로 민족의 절규를 외친 인물이 바로 나석주였습니다. 그는 의열단의 정신을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치 행위로 실현했습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조선식산은행 의거

1926년 12월 28일, 경성 한복판에서 일어난 의거는 조선 민중의 마음을 뒤흔들었습니다.
나석주 열사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본점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인 직원과의 총격전을 벌인 뒤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복수나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의열단의 정치적 메시지 투쟁이었습니다.

그가 겨냥한 두 기관은 식민 경제 수탈의 핵심이었습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강제로 수탈하고, 일본인 대지주와 기업에 헐값으로 넘기도록 주도한 조직입니다. 조선 농민의 삶을 파괴한 직접적 책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 조선식산은행은 일본 자본이 조선 산업을 지배하고, 조선인의 자본 축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데 앞장선 식민지 금융기관입니다. ‘경제적 식민화’의 실질적 도구였던 셈입니다.

나석주의 의거는 단순한 ‘폭탄 투척’이 아닌, 경제적 식민화에 대한 정당한 무력 저항이었습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서울로 잠입해 목표기관의 동선, 출퇴근 시간, 경비 상태 등을 정밀 조사했으며, 폭탄과 권총을 모두 휴대한 상태로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의거 당시, 그는 “너희는 우리의 땅을 빼앗고 백성을 도륙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민족의 복수를 행한다”는 뜻을 내비쳤다고 전해집니다.

총탄이 바닥나고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자, 나석주는 스스로 준비해 온 독극물을 삼켜 자결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곧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의거는 이후 수많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순히 테러나 분노의 폭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식민 통치의 심장을 겨누는 철학적 실천이었으며, 민족에게는 각성의 메시지, 일본에게는 공포와 경계를 안겨준 행위였습니다.

실천철학으로서의 의열 투쟁, 나석주 정신의 오늘

나석주의 행동은 ‘의거’이자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분노의 표현으로 무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의열단의 정신과 전략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사상적 신념으로 흡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은, 무엇보다도 ‘어떤 가치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싸울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실천적 해답이었습니다.

나석주가 남긴 실천철학은 다음과 같은 핵심 가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민족자주(民族自主): 그는 일본의 폭력적 지배뿐 아니라, 그 지배에 순응하는 ‘내면화된 식민성’에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 의로운 폭력의 정당성: 그는 무장 저항이 단지 폭력이 아니라,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의 마지막 자위수단임을 강조했습니다.
  • 행동으로 증명하는 신념: 말이나 이론이 아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실천’을 통해 진정한 저항을 보여주었습니다.
  • 민중 각성의 촉진제: 그의 의거는 조선 민중에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싸울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심어주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의열 투쟁이 폭력에 의존한 비극적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석주와 같은 인물들이 없었다면, 일제의 통치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분위기가 훨씬 오래 지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질문합니다.

  • 불의에 맞선 정의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 인간의 존엄은 어떤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는가?
  • 자주와 독립은 단지 선언으로 가능한가, 아니면 희생이 따라야 하는가?

그의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 철학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단지 ‘의거의 영웅’이 아니라, 신념을 몸으로 실현한 철학자이자 민족 해방의 실천가로 기억해야 합니다.

나석주, 조선의 자유를 위해 총을 든 철학자

나석주는 조선이 억압받는 현실에 맞서, 단순한 투사가 아닌 사상적 저항자, 실천적 전사로서 존재했습니다.
그는 행동으로 철학을 말했으며, 철학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의 의거는 역사 속 폭력의 한 장면이 아닌, 정의의 실천이자, 민중의 절규를 형상화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억압과 불평등, 불의와 침묵의 구조에 맞서, 우리가 어떤 용기와 신념을 가져야 하는지를 되묻기 위함입니다.

“정의는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석주가 남긴 철학이며,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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