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외세의 압박, 내부 정치의 혼란, 사상적 혼돈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은 변화에 적응하거나 이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과 반대로, 변화를 경계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강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선 인물 중 한 명이 **이항로(李恒老, 1792~1868)**입니다.
그는 조선의 유교적 질서를 목숨 걸고 수호하고자 한 사상가로, 위정척사론의 창시자이자 보수 유학의 상징적 존재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항로의 생애, 철학, 그리고 그 사상이 끼친 영향과 현대적 함의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이항로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이항로는 1792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나 성리학 중심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의 성장기는 조선 후기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외세의 위협이 점점 구체화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몰락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서양 세력의 위협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학에 뛰어나 학문에 전념했으며, 특히 주자학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이항로는 스승으로부터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했고, 스스로도 이를 자부했습니다. 그는 조선 유교의 정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걸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도 올랐으나 정치권 내 부패와 혼란을 경험한 후 물러나 지방에서 교육과 저술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이항로는 조선 유학자 중에서도 서간문과 상소문을 통한 정치적 메시지 전달에 탁월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상소문은 후학들에게 끊임없는 사상적 자극을 주었으며, 천주교와 개화사상, 외래 문물에 대한 철저한 경계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 사회가 가져야 할 이상과 도덕적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언급한 ‘도(道)’란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를 의미하며, 이는 단지 도덕적 이상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위정척사론의 철학적 기초: 유교의 절대성과 사상의 자주성
이항로의 철학은 **위정척사(衛正斥邪)**로 요약됩니다.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함을 배척한다’는 이 구절은 단지 하나의 정치적 슬로건이 아니라, 그의 사상 전반을 대변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그는 유교적 질서를 단지 전통이 아니라 ‘우주적 이치’로 인식했습니다. 즉, 성리학적 가치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진리이며, 외세의 문물이나 종교는 그 진리를 파괴하는 요소로 간주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천주교에 대한 강한 거부감입니다. 이항로는 천주교가 조상을 모시는 유교 제사를 부정하고, 가족 질서를 파괴하며, 인간 중심의 유교 윤리를 무너뜨린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신자들의 박해를 정당한 ‘도리’로 주장하며, **‘인륜을 수호하는 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는 또한 서구 문명과 기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기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술과 사상이 유교의 기본 원칙을 위협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모든 문명과 제도의 기준은 ‘도’였으며,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발전된 기술도 조선을 망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항로는 유교적 질서가 무너질 경우, 국가는 내부로부터 무너진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나라가 망해도 도는 지켜야 한다”는 극단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현실적인 생존보다는 정신적 자주와 정체성을 중시한 철학적 선택이었습니다.
척사운동의 사상적 뿌리와 현대적 재조명
이항로는 위정척사론을 통해 조선 후기 유학자들과 유생들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으며, 그 영향력은 생전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사상은 최익현, 김평묵, 유인석 등으로 이어지며 본격적인 **척사운동(斥邪運動)**으로 전개됩니다.
이 항로는 이 사상의 ‘이론적 기초자’이자 ‘도덕적 기둥’으로 추앙받습니다.
척사운동은 강화도조약 이후 외세가 조선을 본격적으로 압박하면서 더욱 확대되었고, 일제 강점기의 항일 의식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민족주의적 자주 의식의 원형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물론 위정척사론은 변화에 대한 극단적 거부로 인해 조선이 시대 흐름에 뒤처지게 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급변하는 외세의 압박 속에서 정신적 무장과 사상적 저항의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항로의 사상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복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화, 기술 발전, 가치 다양성 속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항로의 철학은 그 질문에 대해 하나의 강한 입장을 보여줍니다.
“정체성이 무너지면, 사회는 방향을 잃는다.”
그는 이 철학을 단순한 논리나 이론이 아닌, 실천적 윤리와 행위로 일관하며 살았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지킨 이항로의 사상
이항로는 유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시대 변화에 순응하지 않는 고집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조선의 정체성과 인간 사회의 도덕적 근간을 지키고자 한 깊은 고민과 철학이 자리합니다.
그는 변화보다 원칙, 발전보다 정체성, 현실보다 가치를 우선했습니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 우리 사회의 중심이어야 하는가?”
“어떤 변화는 받아들이고, 어떤 변화는 거부해야 하는가?”
이항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성리학과 도덕적 확신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철학이 모든 이에게 동의받지는 않겠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중심’의 의미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