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고비마다 등장해, 민족의 생존과 정의를 위한 목소리를 내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무장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사상가이자 정치참여자로,
그리고 군사정권 시대에는 독재에 저항한 대표적인 양심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삶은 단지 시대를 살아낸 기록이 아니라, 자유와 민족, 평화와 정의라는 철학을 실천하려 했던 개인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장준하가 보여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궤적, 그리고 그의 실천이 오늘날에 던지는 의미를 깊이 있게 서술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총 대신 철학을 품고 독립운동에 나서다
장준하의 삶은 그 시작부터 특별했다.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제국의 식민지 체제 속에서 조선인의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랐다.
그는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강한 도덕의식을 지녔고,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교사로 일하며 조선 청년의 계몽과 교육을 통해 민족에 기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육만으로는 조선을 바꿀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히며,
장준하는 교사의 삶을 접고 1940년 일본 육군에 강제 징용되어 만주로 끌려간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굴하지 않고 탈출을 감행, 중국 충칭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독립군으로 활동했으며,
중국 국민당 군대 및 미군 OSS와의 연계 작전에도 참여했다.
장준하는 단순히 총을 든 병사가 아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철학과 방향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광복 이후 조선이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상가형 독립운동가였다.
실제로 그는 광복 후 귀국하면서, 단순한 해방에 만족하지 않고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해방 이후, 철학으로 민족을 이끌려 한 지식인
광복 직후 장준하는 교육자와 언론인으로서 활동을 재개하며,
해방된 조선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국민 계몽에 힘을 쏟았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하며 교육철학을 심화했고,
곧이어 잡지 『사상계』를 창간해 대중과 지식인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었다.
『사상계』는 단순한 시사 잡지를 넘어,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 반독재 사상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공간이었다.
장준하는 이 매체를 통해 독재 권력에 대한 비판, 남북 분단의 현실적 접근, 한국인의 정체성과 도덕성 회복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해방 그 자체가 아니라, 해방된 나라를 올바르게 운영하는 힘이다”**라고 강조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당시의 정치 현실에 날카롭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더욱 강화된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에 맞서,
‘독립운동가’라는 자신의 과거를 넘어 ‘시민의 양심’이자 ‘지성의 목소리’로서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논평 활동이 아닌, 실제로 국민이 참여하는 정치 구조 자체의 재편을 고민한 것이었다.
군사독재에 맞선 실천적 저항과 장준하의 최후
1960년 4·19 혁명 이후 잠시 민주의 바람이 불었지만,
이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다시 무너지고,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장준하는 무장 독립운동의 경험과 자유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붕괴에 강력히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는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 내에서 군사정권의 정당성, 유신헌법의 비민주성, 대미 종속적 외교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다.
그의 연설과 칼럼, 강연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자연스럽게 지식인·청년층이 존경하는 대표적인 야권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71년 대선에서 그는 김대중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당시 보수 야권과 진보 야권이 분열되어 있던 구조 속에서 야권 통합의 필요성과 민주주의 회복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는 특정 이념에 경도되지 않은, 진정한 ‘통합형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의 영향력을 경계했고,
그는 지속적인 정보기관의 사찰과 협박, 탄압에 시달렸다.
결국 1975년 8월,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 인근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공식 발표는 ‘실족사’였지만, 많은 이들이 타살을 의심했고, 현재까지도 그의 죽음은 진상 규명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장준하의 죽음은 단지 한 지식인의 최후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사독재에 맞선 시민사회의 상징이 사라진 사건이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시민과 지식인, 야권 인사들이 모여 ‘민주주의의 순교자’로서 그를 기념했다.
장준하, 철학과 실천이 일치한 양심의 기록
장준하의 삶은 단지 독립운동에서 시작해 민주화로 이어진 전환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혼란의 해방정국, 권위주의의 군사정권이라는 세 시대를 관통하며,
항상 자유와 인간의 존엄, 공동체의 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은 실천가였다.
총 대신 펜을 들고, 비판 대신 참여를 선택한 그는
민족주의자이면서도 국제 감각을 갖춘 이성적 정치인이었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철학과 합리적 국가 비전을 동시에 가진 드문 인물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다시 분열과 혐오, 정치적 불신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점에,
장준하가 남긴 메시지는 더욱 중요하다.
그는 국가란 정권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임을 일관되게 외쳤고,
어떤 시대에도 사상의 힘과 실천의 용기만큼 강한 무기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을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양심의 기준이자 행동의 원칙으로 삼을 때,
비로소 장준하가 말한 ‘정의로운 민족국가’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